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 페이건 (문단 편집) === 코치 경력 === 페이건은 넬슨 FC에서 플레잉 코치로 감독직을 맡았다가 1954년 로치데일의 수석코치직에 부임하였고 1년 뒤, 선수생활을 완전히 정리하며 본격적으로 코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미래 에버튼의 감독이 되는 해리 캐터릭 밑에서 1958년까지 로치데일 코치로 일했으며, 코치 외에도 그는 구장 관리와 장비 관리 등 구단에서 다양한 업무를 맡았다. 캐터릭은 1958년, 페이건을 리버풀의 당시 필 테일러 감독에게 추천하였고 그는 리버풀의 코치직을 제안받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ssets.lfcimages.com/6277__5656__04_lfc_shanks.jpg|width=100%]]}}} || || '''리버풀의 위대한 '[[부트 룸]]' 코치진들''' ,,,좌측부터 [[빌 샹클리|{{{#fff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fff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fff 조 페이건}}}]]''', [[로니 머랜|{{{#fff 로니 머랜}}}]], [[루벤 베넷|{{{#fff 루벤 베넷}}}]], [[톰 손더스|{{{#fff 톰 손더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ettyimages-78969544-612x612.jpg|width=100%]]}}} || || '''[[레이 클레맨스|{{{#fff 레이 클레멘스}}}]]를 처치히고 있는 코치 시절의 조 페이건 ''' || 페이건은 결국 리버풀의 코치직을 수락하였고, 선수 시절 한 차례 고사했던 구단에 입단하여 그의 평생을 바칠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페이건이 리버풀에 합류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9년 12월, [[빌 샹클리]]가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1950년대 초 [[그림즈비 타운]]의 감독이었던 샹클리는 당시 페이건을 선수로 영입하려 했기 때문에, 코치진에 페이건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샹클리는 안필드에서 페이건을 만나 첫 마디로 "내가 너와 계약하려고 했었으니 조, 넌 좋은 선수였음에 틀림없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취임 첫 날, 샹클리는 페이건과 [[밥 페이즐리]], [[루벤 베넷]][* 당시 리버풀의 기존 1군 코치진들이었다.]을 모아놓고 자신의 코치진을 데려오지 않을 것이며, 기존 코치들과 일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샹클리는 코치진들에게 서로와 구단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협력할 것을 강조했고, 필 테일러 감독 시절의 단순한 체력 훈련에서 벗어나 "공의 흐름과 속도"를 가지고 하는 기능적이고 전문적인 훈련 시스템을 구단에 도입했는데, 페이건은 넬슨 FC에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을 당시부터 이러한 기능적 훈련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에 샹클리의 플랜에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게 된다. 페이건은 샹클리가 구단에 도입한 새로운 훈련방식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선수들에게 다양한 훈련을 소화시키고 육성했다. 페이건은 샹클리 부임 초기 구단의 리저브팀 감독을 맡았었는데, 이 때 그는 [[로저 헌트]], [[이안 캘러한]], [[토미 스미스]]와 같은, 후에 팀의 핵심이 되는 젊은 유망주들을 다수 육성해냈다. 샹클리의 리버풀은 초기에 스쿼드 리빌딩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고 베테랑들을 대체할 어린 자원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유스 시스템의 혁신과 리저브팀에서의 선수 배출은 여러모로 구단에 엄청나게 중요한 과제였는데, 페이건은 당시 이 중책을 맡아 훌륭히 역할을 해냈다. 샹클리의 전략은 페이건을 통해 리저브팀을 "미래 스타들을 위한 유치원"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이후 샹클리가 "이 도시에는 위대한 두 팀이 있다. 리버풀 FC와 리버풀 FC 리저브다."라고 말한 것도 지속적으로 리저브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물론 지역 라이벌 에버튼을 겨냥한 발언이기도 했다.] 페이건은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리저브팀을 이끌고 2군 대회 3연패를 달성했고, 126경기 중 단 14패만 기록했다. 리저브팀에서 성과를 충분히 올린 페이건은 1971년 1군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샹클리는 1974년 은퇴하였고 밥 페이즐리가 후임으로 감독직을 맡았다. 페이건은 사령탑이 바뀐 시기 팀이 연속성을 유지하며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도록 1군 코치진에서 지속적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페이건은 다른 [[부트 룸]] 코치들이 그랬듯이 조용하고 겸손한 성격이었으나, 리버풀 커리어 내내 코치로서의 뛰어난 능력으로 유명해졌고 계속된 팀 내 활약에 힘입어 1979년, 그는 페이즐리의 수석 코치로 승진하여 팀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전설적인 감독 [[바비 롭슨]]이 80년대 초반 인터뷰에서 페이건을 두고 '''경기장 내 최고의 코치'''라고 치켜세운 바 있을 정도였다. 페이건은 그렇게 25년간 빌 샹클리와 밥 페이즐리를 훌륭하게 보좌했고, 2부 리그를 전전하던 리버풀을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을 넘어 유럽을 지배하는 클럽으로 올려놓는 데에 헌신했다. 코치로서 그는 리버풀의 '''1부 리그 9회, 2부 리그 1회, FA컵 2회, EFL컵 3회, 채리티 실드 9회, 유러피언 컵 3회, UEFA컵 2회, UEFA 슈퍼컵 1회 우승'''에 기여했다. 이렇게 팀 안팎에서 평가가 좋았던 터라, 페이즐리가 은퇴한 후 페이건은 팀의 다음 감독으로 추천되었다. 그는 페이즐리가 처음에 그러했듯이 수석 코치에서 승격하여 감독직을 맡기 꺼렸지만, 당시 리버풀의 전통적인 정책은 '내부 승진을 통한 연속성의 확보'였다.[* 당시 팀의 주축 선수였던 [[이안 러시]]가 밝히기를 당시 리버풀은 내부 승진을 통해 연속성을 지키는 것을 정책으로 삼긴 했으나, 그 일에 적임자가 있어야만 임명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즉, 페이즐리와 페이건은 그냥 수석 코치여서 감독으로 추대된 것이 아니라 보드진 이사회에 의해 확실한 적임자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감독으로 임명된 것.] 페이즐리는 구단 보드진 이사회에 페이건이 선수들과 경기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적임자라는 의견을 피력했고, 결국 '[[부트 룸]]'의 계승을 위해 1983년 7월 1일 페이건이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